카톨릭방

[스크랩] 12월 16일 축일 맞으신 성인

돌핀샘 2010. 12. 16. 10:56
  
    ♡12월 16일 오늘의 성인♡ ================ 성 발렌티누스(Valentinus) 성 콘코르디우스(Concordius), 성 나발리스(Navalis) 성 아그리콜라(Agricola) 축일 12월 16일 군대 지휘관인 성 발렌티누스(Valentinus)는 성 콘코르디우스(Concordius), 성 나발리스, 성 아그리콜라(Agricola)와 함께 이탈리아의 라벤나(Ravenna)에서 순교했다고 전한다. 그런데 여기에는 약간의 의문점이 있다. 왜냐하면 450년에 사망한 라벤나의 주교이며 교회학자였던 성 베드로 크리솔로구스 (Peter Chrysologus, 7월 30일)가 성 아폴리나리스(Apollinaris, 7월 23일)를 라벤나의 유일한 순교자라고 기록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성 발렌티누스와 동료 순교자들은 로마 순교록에서 11월 11일과 13일에 기념하는 성 발렌티누스와 동료 순교자들의 반복이거나, 단순히 라벤나에서 공경을 받는 성인들이거나 또는 후대에 그곳에서 순교한 성인들로 추정할 수 있다. ================================ 성 아나니야(Ananias) 성 아자리야(Azarias) 성 미사엘(Misael) 축일 12월 16일 성 아나니야(Ananias)와 성 아자리야(Azarias) 그리고 성 미사엘은 바빌론의 왕 느브갓네살 (또는 네부카드네자르)의 박해 때 가마 속에 던져졌으나 그 가마 속에서 하느님을 찬미했던 바빌로니아(Babylonia) 근교에 살던 세 명의 젊은이들이다(다니 3,1-50. 88). 그들은 결국 바빌론 왕으로부터 신앙의 자유를 얻어냈다. ================================ 성 세바스티아노(Sebastian) 축일 12월 16일 세바스티아누스 마기 (Sebastianus Maggi, 또는 세바스티아노)는 브레시아 출신으로 15세 때에 설교자회에 입회하였다. 그 후 그의 선교는 대성공이었고, 수많은 죄인을 회개시켰으며 불화 속에 신음하는 가정에게 화목을 심어 주었다. 그는 뛰어난 설교자였고, 당시의 최고 성인으로 꼽히던 히에로니무스 사보나롤라 (Hieronymus Savonarola) 신부의 자질과 덕행에 견줄 수 있을 정도로 덕 있는 사람이었다. 그는 불과 29세의 나이로 볼로냐(Bologna) 수도원의 수련장이 되었다. 그는 관구를 순회하며 형제들을 방문하던 중에 제노바(Genova) 수도원에서 병이 들어 운명하였다. ================================ 성녀 아델라이드(Adelaide) 축일 12월 16일 950년 이탈리아 왕 로타르(Lothair)의 아내였던 성녀 아델라이드는 그녀의 남편이 죽은 후 오토 대제의 두 번째 부인이 되었다. 962년 교황 요한 11세(Joannes XI)에 의하여 황녀로 대관하고, 973년에 오토 대제가 사망하자 거의 20여 년 동안 가계와 정치 분쟁에 휘말렸다. 그녀의 아들 오토 2세조차 그의 그리스인 아내 테오파누스의 조작에 따라 자신에게 반기를 들게 되자 잠시 궁중을 떠나 부르고뉴(Bourgogne)에서 지냈다. 비슷한 일이 그의 손자 때에도 발발하여, 995년부터 그녀는 평화스런 생활을 보낼 수 없었다. 그녀는 마그데부르크(Magdeburg)의 성 아달베르투스(Adalbertus, 6월 20일), 마인츠(Mainz)의 성 빌리지스(Willigis, 2월 23일) 같은 사람들의 우정과 권고로부터 영웅적인 힘을 얻었다. 그녀는 알자스(Alsace)에 셀츠(Seltz) 수도원을 세웠는데, 그곳에서 영면하였다. ================================ 성 아도(Ado) 축일 12월 16일 성 아도는 가티내(Gatinais)의 좋은 가문 태생으로 프랑스의 상스(Sens)에서 태어나, 페리에르의 베네딕토 수도원에서 유명한 루푸스 세르바투스 (Lupus Servatus)의 문하에서 교육을 받았다. 그는 교육을 마친 후 세속에 돌아가기를 거부하고 수도자가 되었는데, 그의 성덕과 학덕이 매우 뛰어났다. 그는 처음에 시굴푸스 원장의 요청으로 프럼 수도원에서 가르치다가 리옹(Lyon)으로 갔는데, 여기서 성 레미기우스(Remigius)가 그에게 본당 사목을 맡겼다. 그의 스승이요 페리에르의 원장이던 루푸스가 비엔(Vienne)의 주교로 가자 아도가 그 후임 주교로 선정되었다. 그는 지칠 줄 모르는 설교가였다. 그의 설교 형식은 매우 독특한데, 그 한 가지 예를 보자. “복음에서 여러분에게 말하는 영원한 진리를 들어보시오. 혹은, 지금 당신에게 말씀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들어보시오. …” 또한 아도는 여러 권의 책을 저술했는데 그의 순교록이 잘 알려져 있다. 그는 또 성 데시데리우스(Desiderius)와 성 테우데리우스 (Theuderius)의 전기, 6세기의 세계사 등을 저술하였다. 그는 비엔에서 875년 12월 16일 사망하였다. ================================ 성녀 알비나(Albina) 축일 12월 16일 카이사레아(Caesarea)에서 태어난 성녀 알비나는 데키우스 황제의 박해 중에 체포되어 젊은 나이에 그리스도를 증거하였다. 그녀는 카이사레아 또는 이탈리아 캄파니아 (Campania) 지방의 포르미에(Formiae)에서 순교하였다. 로마 순교록에 기록되어 있는 성녀 알비나의 순교 이전의 생애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거의 없다. ================================ 성 이레니온(Irenion) 축일 12월 16일 성 이레니온은 팔레스티나(Palestina) 지방 가자의 주교였다. ================================ 성녀 마리아,(Mary) 동정(1717년 순교) 축일 : 12월 16일 11자녀 중에서 아홉 번째인 마리아는 지극히 총명하여 주위 사람들의 사랑을 독차지 하며 자랐다. 6살 때 그녀는 자기 남동생과 함께 "사막에서 살려고 도망갈 계획을 꾸민 깜찍한 소녀였다. 그러나 출발 전날에 중병이 걸려 2년 동안이나 앓았는데, 이때 소녀는 처음으로 환시를 보았고, 그 다음해에 첫 영성체를 하였다. 가야파의 종들에게 모욕당하신 주님의 얼굴이 그녀의 가슴을 떠나지 않았다. 1676년, 그녀는 산타 크리스티나의 가르멜 수도원에 입회했으나, 지독한 향수병에 걸린 경험도 있었다. 1690년, 그녀는 지도신부로부터 자신의 신비체험에 대한 글을 쓰라는 권고를 받고 집필하기도 하였다. 30세 때에는 수련장으로도 활약했으며, 세 번이나 원장직도 역임하였다. 그후의 25년은 글자 그대로 "그녀의 성덕과 향기"가 내뿜은 시기였다. 실제로 그녀의 몸에서 나는 이 향기는 그녀의 옷과 만지는 모든 물건에까지 배어들었으니, 1702년 부터는 이 현상이 늘 계속되었던 것이다 사르디니아 대주교인 코스딴쪼는 이렇게 증언하였다 :"이 향기는 자연적인 것도 아니고 인위적인 것도 아니다. 오로지 성덕의 향기일 뿐이다." "순종은 하느님이 원하시는 것을 원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나는 순종이 원하는 바를 행할 것이다." 이 말씀은 그녀가 순종에 대한 질문을 받고 대답으로 한 말이다. 또 그녀의 마지막 말은 다음과 같다 : "주께서 저를 축복해주소서. 세상의 모든 일에서 실지로 이탈하게 해주소서." ================================ 성 에우세비오(eusebius) 축일 : 12월 16일 사르디니아 태생으로서 어느 순교자의 후손으로 어렵게 자랐다. 그의 어머니가 그를 데리고 이사하였기 때문에, 에우세비오는 로마에서 성장하고 공부하여 사제로 서품되었다. 그 후 그는 베르첼리의 주교로 선출되어 그곳에 착좌하였다. 그는 교구내의 성직자 개혁운동을 전개했고, 성직 생활과 수도생활의 일치를 시도했던 서방교회의 첫번째 주교로 손꼽힌다. 그는 일단의 성직자들과 더불어 공동체를 이루어 살았다. 그는 정통 교회를 고수하는 강력한 주교였다. 아리아파에 대한 그의 강력한 반대 입장 때문에 그는 많은 곤욕을 치뤘는데, 밀라노 회의에서 성 아타나시오를 단죄하는 결의를 반대한 결과로 인하여 황제 콘스탄씨우스로부터 차방당하였다(355년). 이리하여 그는 6년 동안 팔레스타나에서 유배생활을 하였다. 너무나 심한 모욕과 고통을 당하였기에 그는 이에 항의하는 뜻으로 4일 동안 단식투쟁을 벌이기도 하였다. 그 다음에는 카파도치아로, 또 그 다음에는 에집트의 테바이로 유배갔다. 362년에 콘스탄씨우스가 죽고, 배교자 율리안이 황제가 된 후에 유배된 주교는 각자의 교구로 돌아가도 좋다는 허락에 따라 귀향하였고, 362년에 열린 알렉산드리아 회의에 참석할 수 있었다. 그는 이 회의에서 안티오키아로 파견되는 사절로 뽑혔는데, 그의 임무는 331년에 아리아파에 의하여 안티오키아의 주교로 선출된 멜레씨우스 추종자들 사이의 불화를 조정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는 아무 일도 하지 못하고, 세월만 허송하였다. 그후 그는 일리리꿈 지방을 다니며 정통 교회를 옹호하고, 아리아파를 배격하는 운동을 꾸준히 전개하였고, 363년에 베르첼리로 돌아왔다. 그는 여생을 성 힐라리오와 함께 아리아파와 싸우는데 보냈다. 베르첼리에는 라틴어로 된 복음서 사본이 보물로 간주되고 있는데, 이 사본은 성 예로니모의 불가타본보다 시기적으로 더 앞선 것이라 한다. 학자들은 성 에수세비오의 손에 의하여 기록되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이 사본은 꼬덱스 베르첼센시스라 한다. 그는 아타나시오 신경의 저자 중의 한 사람이다.
출처 : 성바실리오성당
글쓴이 : 엘리사랑 원글보기
메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