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말라야 (네팔)

히말라야14좌

돌핀샘 2016. 10. 10. 06:22




                     세계 8,000m 이상 14좌

 

<1> 에베레스트

에베레스트 산

 

■ 에베레스트 / 초모랑마(8.848m 북위 27도 59분 동경 86도 55분) 영국은 1849년부터 식민지였던 인도 북부에 광활하게 펼쳐져 있는 히말라야산맥에 대한 광범위한 측량사업을 벌이면서 P15란 기호로 표시되어 있던 유난히 높은 봉우리에 관심을 갖고서 측량을 하게되었다. P15봉우리가 정확하게 측량이 된 것은 그로부터 3년이 지난 1852년에 정확한 높이가 8.848m로 측량이 되었지만 그 후로도 계속 P15봉우리로 불리다가 1865년에 가서야 당시의 측량국 장관이었던 조지 에베레스트경의 이름을 따서 에베레스트란 이름으로 지금까지 불려지고 있다. 티베트 말로는 초모롱마(Chomoungma), 사가르마타 불린다. 에베레스트는 영국의 산이라고 말할 수 있다. 영국은 1919년 에베레스트위원회를 조직하여 원정을 주관하였다. 에베레스트에 대한 최초의 도전은 1921년 하워드 버리가 이끈 4명의 대원과 3명의 과학자가 참가한 정찰 원정이었다. 최초의 원정대는 1922년 인도 고르카 연대의 준장이었던 부르스대장을 포함한 12명의 대원이 7.600m에 제 5캠프를 설치하면서 세 차례의 정상공격을 감행하여 북동릉 8.326m까지 전진하는 기록을 세웠다. 이후에도 일곱 번의 원정이 있었으나 별다른 성과를 내지 못하였다. 1953년 영국은 존 헌트를 대장으로 제 9차 에베레스트 원정대를 파견하여 5월29일 오전 11시 30분 드디어 에드먼드 힐라리와 셀파인 텐징 노르게이가 에베레스트 정상에 올라섰다. 에베레스트가 세계 최고봉으로 밝혀진 지 100년만의 일이다. 1999년 9월에 발견된 조지 말로리의 시신은 세상을 다시 한번 긴장하게 만들었다. 1924년 3차 원정대원으로 참가하여 6월 27일 마지막 일기를 써놓고 조지 말로리와 앤드류 어빈은 정상을 향했고 그들은 다시 돌아오지 않았다. 1924년 그들은 정상에 섰는가? 75년 만에 발견이 된 유품 중에서 그들이 갖고 있던 코닥카메라에 관심이 쏠렸다. 그러나 사진 현상에는 실패하여 결국 의문만을 남기고 말았다. 조지 말로리는 살아서는 그 유명한 말 "산이 거기에 있기 때문에 오른다" 라는 말을 남겨서 유명했고 죽어서는 그는 과연 `올랐는가` 아니면 `오르지 못하였는가?` 끊임없는 궁금증만을 남겨 놓고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에베레스트 동계 초등정은 1980년 폴란드 크리스토프 비엘리키(8.000m 5번째 완등자)와 안드레이 자바다가 세웠다. 최초의 여자 등정자는 1975년 5월16일 일본의 다베이준코가 정상에 등정했다. 최초의 무산소 등정자는 1978년 5월 8일 등정한 라인홀트 메스너로 그는 이 등반으로 철인이라는 명성을 얻으면서 산소 없이도 오를 수 있다는 새로운 가능성을 보여주었다. 아직까지 등정이 되지 않은 미등의 루트는 동릉이다. 1982년 조 태스커와 피터 보드맨이 마지막 피너클 부분(8.400m)을 통과하지 못하고 사망한 채로 1996년 일본의 원정대에 의해서 발견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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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K2

 

■ K2 / 쵸고리(8.611m 북위 35도 53분 동경 76도 31분) K2는 북위 35도 53분 동경 76도 31분 파키스탄 카라코람 발토르 빙하에 있다. 1856년 독일의 과학자 아돌프 슈라긴트바이트와 영국의 측량장교 몽고메리가 무스타그고개에서 측량을 하면서 카라코람 고봉들을 식별할 수 있도록 K1, K2....., 로 이름을 붙인 것이 현재의 이름이 되어버렸다. 현지인들이 부르는 이름 초고리는 K2 만큼 이름을 얻지 못하였다. 최초의 원정대는 1902년 영국의 엑켄스타인이 이끈 국제원정대가 6.812m까지 올라갔다. 그후 몇 차례의 원정이 있었으나 초등등정은 1954년 이탈리아 원정대의 라체델리, 콤파뇨니가 7월 31일 아브루찌릉을 경유하여 정상에 도달했다. 이탈리아 원정대는 초등당시 등정자의 이름을 밝히지 않았다. 그 이유는 등정의 영광은 두 사람만의 몫이 아닌 원정대원 전체의 몫이라는 것이다. 등정자의 이름이 밝혀진 것은 그로부터 오랜 세월이 흘러야 했다. 정상에 이르는 길은 남동릉, 북동릉, 서릉, 북릉, 남벽, 남서릉, 북서벽과 그 변형된 12개의 루트가 있지만 그 어떤 루트도 쉬운곳이 없기에 높이로는 2위 봉이지만 등반가들 사이에서는 `세계에서 가장 어려운 산`으로 인정받고 있다. 반다 루트키에비치는 두 번에 걸쳐 실패하면서 초고리는 `세상에서 가장 장엄한 산`이라고도 했다. 장엄하다고 한 것은 이 산이 가장 오르기 힘들면서도 가장 아름답기 때문이다. 1902년에 K-2의 등정을 시도한 아부르치공인 루드비히 폰 사보엔은 정상이 틀림없이 인간이 도달할 수 있는 거리밖에 있다고 하면서 `나는 사람이 오를 수 없는 벽이 있는 그런한 산을 처음 봤다` . 라고..., 라인홀트 메스너는 이런 말을 했다` 사람을 기진맥진하게 만드는 K2의 등반에 비하면 에베레스트는 뚜렷이 끝이 보이는 그야말로 산책과 같다`고. 이 산의 서벽은 세계의 등반가들이 풀어야할 마지막 벽이다. 폴란드의 보이테크 쿠르티카가 4번의 서벽 원정대를 이끈적이 있다. 보이테크 쿠르티카는 90년 3월 16일부터 19일까지 우리나라을 방문한 적이 있다. 24년 만에 `한국 2000년 K-2 영호남 합동원정대`는 6월 26일, 6월29일 1,2차에 걸쳐서 8명을 등정시켜 단일 팀으로는 가장 많은 유래가 없는 기록을 세웠다. 이 등반에서 박정헌 등반대장(8.000m 5개등정)은 자신도 무산소 등정을 하면서 ( 94년-안나푸르나 남벽, 95년 에베래스트 남서벽, 96년 몽블랑 프레니 기둥바위, 97년-낭가파르밧 등정) 벽등반 해결사의 이미지를 더욱 확고히 했다. 2001년 극장가에 버티칼 리미트란 영화가 상영이 되고 있어 간접경험을 한 번 느껴봄 이 어떨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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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칸첸중가

칸첸중가(Kanchenjunga)

 

■ 칸첸중가(8.586m 북위 27도 42분 동경 88도 09분) 칸첸중가라는 말의 의미는 `위대한 눈의 다섯 개의 보고`라는 뜻으로 주봉 8,586m, 중앙봉 8,482m, 남봉 8,476m, 서봉 또는 얄룽 캉이라 불리는 8,505m의 산군으로 이루어졌다. 첫 등반은 1929년 독일원정대가 북동릉으로 약 7,400m까지 올랐다. 그 후 여러 차례의 시도가 있었고 초 등정은 1955년 영국 원정대가 5월 25일 등정하였다. 그러나 이들은 현지인의 성지로 되어 있는 정상의 몇 미터 아래에서 멈추어서 경의를 표했다. 이산은 에베레스트가 최고봉으로 알려 지기 전까지는 세계 최고봉으로 알려졌었다. 얄룽 캉이라는 별도의 이름을 가진 서봉은 로체샤르(8.400m)와 같이 비운의 봉이라고 할 수 있다. 독립봉 으로서의 충분한 자격을 갖췄다고 볼 수 있는 이 봉은 발견당시 이름이 없고 칸첸중가 서봉이라는 이름으로 불리다보니 독립봉으로 대접받지 못하고 있다. 발견당시부터 지금 같은 얄룽 캉이라는 이름을 갖고 있었다면 당당히 세계 5위봉이 됐을텐데....., 이와 비슷한 조건을 가진 세계 4위봉인 로체는 에베레스트의 위성봉 이면서도 독립봉으로 취급되어 14좌의 반열에 들어 있는데도 말이다. 이산의 비운 만큼이나 비운의 등반가가 이곳에서 사망했다. 브누아 샤무(95년 사망)와 반다 루트키에비치(95년 사망)가 그들이다. 13개의 8.000m를 오른 프랑스의 브누아 샤무는 스위스 에라르 로레탕과 3번째 완등자의 자리를 놓고 각축을 벌이다 마지막 봉인 이산에서 정상을 눈앞에 두고 강풍과 추위에 돌아섰지만 실종되었다. 에라르 로레탕은 같은 날 등정함으로써 3번째 완등자의 영예를 안았지만 그는 비운의 주인공이 되었다. 역시 8개의 8.000m를 오른 폴란드의 여성등반가 반다 루트키에비치도 칸첸중가 북면에서 실종 사망하였다. 영국의 지넷 해리슨(41)은 유일한 여성 등정자이다(마칼루, 에베레스트,칸첸중가, 초오유등정 -1999년 10월 24일 다울라기리 등반중 눈사태로 사망) 89년 구 소련의 아나톨리 부크리프(8.000m급 봉우리를 21번 등정-97년 12월 25일 안나푸르나에서 사망)는 이 산의 4개 봉우리를 횡단하는 기록을 세웠다. 최초의 동계 등정은 5번째 8.000m완등자인 폴란드 크리스토프 비엘리키가 1986년 1월 11일 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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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로체

로체(Lhotse)

 

■ 로체(8.516m 북위 27도 58분, 동경 86도 56분) 로체란 이름은 로는 티벳말로 남쪽, 체는 산이란 뜻으로 에베레스트 남쪽의 산이란 뜻이다. 처음 로체란 이름을 붙인 것은 1921년 영국의 에베레스트 원정대이다. 에베레스트에 남쪽으로 3킬로미터 밖에 떨어져 있지 않아 에베레스트의 위성봉 이라는 소리를 들었지만 지금은 독립봉으로 세계 4위봉 이라는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얄룽 캉은 독립봉으로 인정받지 못하여 칸첸중가 서봉 이라고 불리는 것과 대조를 이룬다. 첫 등반은 1955년 N.다이렌퍼스가 이끈 국제원정대가 시도하여 8.100m까지 등반을 하였다 초 등정은 1956년 5월 18일 알베르트 에글러가 이끈 스위스 원정대의 F.루히징거, E.라이스가 서벽을 경유하여 초 등정하였다. 이들은 여세를 몰아 에베레스트 두 번째 등정이라는 기록도 세우면서 두 개봉 등정이라는 기록도 세운다. 로체의 위성봉인 로체 샤르(로체 동봉)(8.383m)도 독립봉이다, 아니다 논란의 대상이다. 로체 샤르의 초등정은 1970년 S. 애벌리가 이끈 오스트리아 원정대가 남릉과 남동릉을 경유하여 S. 마이얼과 R. 발터가 초등정을 하였다 그러나 이 등반은 원정허가가 로체에 대해서만 발급이 되어서 무효로 간주되었다. 로체는 주봉(8.516m). 중앙봉(8.414m). 로체 샤르(8.383m)로 되어 있는데 중앙봉은 아직도 미등으로 남아있다. 로체는 21세기 산악인들이 풀어야 할 두 개의 난제를 갖고 있다. 라인홀트 메스너가 `21세기 과제`라고 한 로체 남벽과 로체 주봉과 중앙봉, 샤르를 잇는 종주등반이다. 로체 남벽에 대한 최초의 등반은 1974년 리카르도 캐신이 이끈 이탈리아 원정대(라인홀트 메스너참가)가 도전을 하였으나 실패한다 1989년 10월 24일 두 번째 8.000m 완등자 폴란드의 예지 쿠쿠츠카는 로체 남벽 등반중 추락사망을 하여 세계 산악계에 충격을 주었다. 토모 첸슨이 1990년 단독등정을 하였다고 주장을 하고 있으나 많은 의혹을 사고 있다. 로체 종주등반의 시도는 1994년 에라르 로레탕과 트르왈레가 시도하였다. 라인홀트 메스너는 1986년 10월 16일 한스 캄머랜드와 등정을 함으로써 세계 최초의 8.000m완등자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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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마칼루

마칼루(Makalu)

 

■마칼루(8.463m 북위 27도 53분, 동경 87도 05분 ) 마칼루는 힌두교의 시바신의 화신 "마하카라"에서 비롯된 산스크리트어로 "검은 신"의 뜻이다. 실제 마칼루는 밑에서 보면 흑갈색의 화강암으로 이루어져 다른 산에 비해 검게 보인다. 최초의 정찰은 1921년 영국에 의해서 정찰되었다. 이후에도 계속 정찰은 되었지만 최초의 원정대는 1954년에 미국원정대가 시도하여 7,200m까지 도달하였다. 이때 에드먼드 힐라리가 이끈 뉴질랜드 원정대도 마칼루에 왔지만 등반허가를 갖지 못했기 때문에 대신 6,000미터 봉우리 25개를 오르는데 만족해야 했다. 이때 힐라리는 크레바스에 추락 큰 부상을 입었다. 초 등정은 1955년 5월 15일, 16일, 17일 프랑스원정대가 전 대원이 등정을 하면서 성공하였다. 서벽은 아직도 미등으로 남아있지만 3000m이르는 서벽 중앙의 등반선은 극도의 어려움이 존재하고 있다. 1981년 보이테크 쿠르티카에 의해 시도가 이루어 졌지만 7,200m지점의 록밴드 초입등반에 만족해야 했다. 1982년 폴란드와 1997년 러시아 등반대가 좌우 벽을 공략하여 등정을 하였지만 그중 3명이 사망하는 대가를 치렀다. 1984년 3월 1일 캐나다의 샤론 우드를 포함한 6명의 여성 산악인이 등정을 하여 여성 초등 정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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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초오유

초오유(Cho Oyu)

 

■ 초오유 (8.201m, 북위 28도 06분 동경 86도 40분) 8.000m봉우리에서 가장 인기가 있고 가장 안전하다는 통계가 나온 산이다. 1952년 영국에 의해서 동서면 정찰이 되고 1952년 영국이 북서면으로 E, 쉽턴. E. 힐라리 W. 로우가 약 6850m까지 도달하였다. 초등정은 1954년 10월19일 오스트리아의 소규모 원정대(헤르베이트 티히, 제프 외일러, 셀파 파상 다와)가 무산소로 서릉과 서벽을 통하여 등정하였다. 티히는 동상으로 두팔을 절단하는 비운을 맞는다. 같은 때에 프랑스 여성 C. 코강과 스위스인 R. 람베르가 허가 없이 등반을 강행했으나 7700m에서 후퇴했다. 1959년 프랑스의 C. 코강은 벨기에 출신의 여성등반가와 다시 도전하였으나 제 4캠프에서 눈사태로 사망을 한다. 1964년 R. 로트 대장이 이끈 독일의 스키원정대, F. 슈탐베르거가 제 3등을 하였다고 주장 했으나 정상사진이 불확실하여 인정을 받지 못했다. 1978년에는 오스트리아의 E. 코블뮐러와 A. 푸르트너가 트레킹 목적으로 들어와서 남동벽으 로 등정을 하였으나 무허가 입산으로 현지인들의 분노를 사 5년간 입산금지 처벌을 받았다. 라인홀트 메스너는 1983년 H. 캄머랜드, M. 다허와 5월 5일 남서사면에 부분적으로 루트를 개척하며 등정한다. 1987년 스페인의 페르난도 가리도는 단독으로 올라 8천미터급 최초의 동계 단독등정을 기록 한다. 예지 쿠쿠츠카는 1985년 2월 15일 동남벽에 루트를 개척하며 동계 초등을 이룩한다. 한국은 1989년 대구 경북연맹이 등정하였다고 발표했으나 등정자인 홍경표대원이 양심 선언을 함으로써 미등정으로 끝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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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다울라기리

다울라기니(Dhaulagiri)

 

■ 다울라기리(8167m, 북위 28도 42분 도영 83도 30분) 1949년 최초의 항공사진 촬영 이후 1950년 프랑스를 시작으로 1959년까지 모두 북벽을 통하여 등반이 이루어졌지만 3명의 사망자만 발생하고 실패하였다. 1960년5월 13일 막스 아이젤린의 스위스원정대가 북동릉을 경유하여 5월 13일, 23일에 9명 이 초 등정에 성공했다. 1969년 미국은 남동릉으로 도전하였으나 7명(대원 6명, 셀파 1명)이 사망하며 실패한다. 1978년 일본 원정대는 남릉을 통하여 루트 초등정을 하나 1명의 대원이 사망한다. 같은 해에 일본의 다른 원정대가 남벽과 남동릉을 경유하여 성공하나 4명의 희생자를 냈다. 1980년 보이테크 쿠르티카가 이끈 폴란드원정대가 동벽을 완등한다. 1980년 초등정을 했던 스위스의 막스 아이젤린은 또다시 17명을(대원 14명. 셀파 3명) 등정 시킨다. 1982년 일본등산가 A.코이즈미가 셀파 완츄와 같이 동계 초등정에 성공한다. 이 등반은 8.000m봉 최초의 동계 초등정이 된다. 1984년에는 프랑스원정대가 남서릉을 체코원정대는 서벽을 초등정한다. 라인홀트 메스너는 1985년 5월 15일 한스 캄머랜드와 제 20등을 한다. 1995년 카자흐스탄의 아나톨리 부크리프가 17시간만에 등정하는 기록을 세웠다. 1998년 프랑스의 여성 산악인 샹탈 모 뒤(92년 K2, 93년 시샤팡마, 초 오유,96년 로체, 97년 가셔브룸2봉 등정)가 2캠프에서 사망을 하여 K2를 등정한 여성 산악인 5명이 모두 불귀의 객이 되었다. 2000년 11월 1일 슬로베니아의 토마즈 후마르 남벽 솔로 등반을 감행하여 남벽은 성공하고 정상에는 이르지 못했다. 2000년 10월 24일 지넷 해리슨(영국 - 에베레스트, 칸첸중가, 초오유, 시사팡마 중앙봉, 마칼 루, 7대륙 최고봉 등정) 1962년 한국 박철암(현 경희대 명예교수)가 이끈 다울라기리2봉 원정대는 한국 히말라야 원 정시대의 문을 여는 등반이었다. 1988년 한국 부산합동 조정술대장은 재도전끝에 11월 14일 최태식대원이 등정을 하지만 동상으로 8개의 발가락을 절단하는 아픔을 겪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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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마나슬루

마나슬루(Manaslu)

 

■ 마나슬루 (8163 m, 북위 28도 33분, 동경 84도 33분) 1950년 영국 원정대가 처음 눈으로 직접 확인하고 정찰한 후, 1952년 일본 원정대가 북측에서 동릉을 지나는 등반 가능루트를 찾아낸다. 1956년 5월 9일 Y. 야마자키가 이끄는 일본원정대가 5월 9일에 이마니시 고토와 사다 가르첸 노르부가 정상에 오른다. 이때 정상에 머물면서 16mm무비카메라로 주변 풍광을 촬영하여 8.000m에서 찍은 최초의 무비 필름이 되었다. 5월 11일에 K. 가토와 M. 히게다가 정상에 올라 아시아국가로는 처음으로 8.000m초등 국가가 된다(시샤팡마는 중국 내에 있기에 개방을 하지 않고 자기들이 등정을 함) 1971년 일본은 북서벽과 서릉을 경유하는 신루트를 개척하며 2등을 이룩한다. 1972년 4월 10일 라인홀트 메스너가 포함된 오스트리아 원정대는 남서벽에 신루트를 개척하며 3등을 이룬다. 한편 반대편의 한국의 마나슬루 원정대는 71년 5월 4일 1명의 대원을 잃는 아픔을 딛고 또 다시 도전을 하지만 15명(대원 5명, 셀파 10명)이 사망하는 대 참사를 겪으면서 패퇴한다~히말라야 등반사상 2번째 대 참사로 기록된다 1974년 일본의 모리 미예코, 우치다 마사코, 쿠리바야시 나오코가 등정을 하며 8.000미터 봉의 여성 초 등반기록을 세운다. 1976년 한국합동대는 1차(김호섭), 2차(김예섭)원정에서 두 형제를 잃은 김정섭 대장이 재 도전을 하지만 또 다시 실패한다. 1980년 4월 28일 이인정대장이 이끈 동국산악회의 서동환대원이 노말 루트로 8등을 하면서 오랜 숙원을 달성한다.(의혹제기) 이 등정은 에베레스트에 이은 두 번째 8.000m등정이며, 단일 산악회가 해낸 최초의 등정이다 1981년 프랑스 원정대는 서벽으로 등정을 한다. 1981년 서독-오스트리아-스위스의 원정대는 대원 13명과 셀파 3명이 등정을 한다. 이때 J. 밀링거와 P. 뵈르괴터는 8125m에서 스키활강을 하여 성공적으로 내려온다. 1983년 제천산악회의 허영호는 북동릉을 통하여 단독등정을 하면서 자신의 이름을 고산 등반계에 내놓는 계기가 된다. 1984년 폴란드의 엘와우, 비엘리키가 남릉을 동계 초 등정한다. 1986년 쿠쿠츠카의 지휘아래 폴란드원정대는 동릉으로 등정하고 북동벽으로 하산하는 신 루트를 개척한다. 1991년 3명의 우크라이나 클라이머들이 남릉을 재등하면서 이 산을 처음으로 트래버스한다. 1996년 프랑스의 샹탈 모 뒤가 여성 등정자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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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낭가 파르바트

 

■ 낭가 파르바트 (8125 m, 북위 35도 14분, 동경 74도 35분) 파키스탄 내륙 깊숙이 자리하고 있는 이 산은 초등이 되기 전까지 무려 30여명의 등반가들이 사망을 했던 등반가 들에게는 무시무시한 산이었다. 1895년 영국의 머메리가 정찰 후 디아미르 측면을 시도하다 6.100m에서 실종되었다. 이 사건은 히말라야 최초의 조난으로 기록된다. 1932년 독일-미국합동대가 북쪽으로 공략하였으나 실패하고 리키오트 피크 초 등정에 만족해야 했다. 1934년 독일은 다시 도전을 하였으나 1명의 대원과 6명의 셀파가 사망 실패. 1937년 독일은 또 다시 16명(대원 7명, 셀파 9명)이 사망 실패한다. 1953년 독일, 오스트리아원정대는 7월 3일 헤르만 볼에 의해 초 등정을 이룩한다, 대장은 철수를 지시하나 헤르만 볼은 단독 등정을 강행 초 등정을 한다. 이때. H. 에르틀은 기록 영화를 촬영했다 1970년 6월 27일에 라인홀트 메스너와 권터 메스너는 루팔벽으로 완등하며 계획에도 없는 종주등반을 하는데 하산 중 권터 메스너가 디아미르 측면 밑에서 눈사태로 사망했다. ~루팔벽은 아직 재등이 되지 않았다. 1976년 오스트리아 4인의 원정대는 루팔벽 왼쪽의 루트에 정상에 도달할 수 있는 가장 간단한 루트를 개척했다. 1978년 라인홀트 메스너는 디아미르 측면을 통해서 단독 초 등정에 성공한다. 이 등반은 8000m봉 최초의 단독 등반이 되었다. 이 루트도 아직까지 재등이 되지 않았다. 같은 해 오스트리아 소규모 원정대가 킨스호퍼 루트로 재등에 성공하며 1962년 루트보다 쉽고 새로운 루트를 발견했다. 1985년 폴란드의 W. 루트키에비치외 4명의 여성원정대가 여성초등을 해낸다. 같은 해 예지 쿠쿠츠카는 7월 13일 하인리히, 로보드진스키, 카르솔리오등과 동남벽에 루트를 개척하며 등정한다. 2000년 일본의 가츠요시 콘도는 57세에 정상에 올라 최고령등정자가 됐다. 한국은 1988년 한국산악회 합동팀이 처음 도전하여 실패한다. 1991년 한국-홍콩합동대(김형주)가 3명이 등정하였다고 주장했으나 자료 미비로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 1992년 6번의 도전 끝에 한국 광주 우암 산악회(김주현)와 경남합동대(박희택,송재득)가 같은 날 3명의 대원이 등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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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안나푸르나

안나푸르나 

 

■ 안나푸르나(8091m) 북위 28도 36분. 동경 83도 49분 1950년 이 때까지 안나푸르나는 탐사가 전혀 되지 않았다. 모리스 엘조그가 이끄는 프랑스 원정대는 본래의 목표였던 다울라기리에서 이 산으로 진입하여 등반로를 정찰했다. 안나푸르나가 등정되기 전까지는 1931년 등정이 된 인도 가르왈 히말라야의 카메트(7.756m)가 인류가 오른 히말라야 최고봉이었다. 원정대는 북쪽의 빙하 분지에서 등반 가능성루트를 찾아내고 등반을 시작하여 인류 역사상 8000m초등이라는 영예를 안는다. 그러나 영광 뒤에는 처절한 하산이 기다리고 있었다. 흥분제를 복용하고 등반을 한 엘조그와 루이 라쇼날은 크레바스에 빠지고 눈사태에 휩쓸리면서 최악의 비박을 하면서 처절한 하산을 한다. 그러나 등반 중 입은 동상으로 인하여 하산하며 손가락과 발가락을 절단해 가면서 하산을 했다-초등 안나푸르나(모리스 엘조그)에 자세히 나와있다 1970년 크리스 보닝턴이 이끄는 영국원정대가 남벽을 디렛티시마로 오르면서 히말라야 등반방식에 새로운 가능성을 확립하며 루트 초 등정을 해낸다. 1974년에는 스페인 원정대가 동봉(8026m)을 초 등정 한다. 1977년 네덜란드원정대가 북측에 새로운 루트를 개척하며 대원 3명이 등정한다. 1978년 10월 15일 미국의 여성원정대가(이렌 밀러, 베라 코마르코바) 여성 초 등정을 한다, 그러나 2차 공격대원 2명이(베라 왓슨,엘리슨 오니츠키예비치) 사망하는 비운을 맞는다. 1979년 프랑스 스키원정대는 2명이 등정을 하지만 스키 활강 중 Y. 모랭이 조난사한다. 1981년 폴란드원정대는 새로운 루트를 개척하며 중앙봉(8051m)를 초 등정한다. 1984년 남벽의 새로운 루트를 2명의 스페인원정대가 알파인 스타일로 중앙봉을 등정한다. 같은해 스위스 원정대의 에라르 로레탕과 N. 유스는 불과 3일만에 동봉, 중앙봉, 주봉을 경유하는 트레버스를 알파인 스타일로 해낸다. 1985년 라인홀트 메스너는 한스 캄머랜드와 미등의 북서벽을 4월 24일 등정한다. 1987년 2월 3일 예지 쿠쿠츠카와 하인리히가 동계 초 등정을 한다. 1991년 폴란드의 반다는 여성 초 등정을 기록한다. 1995년 슬로베니아의 형제 등반가는 스키로 정상에서 모레인지대까지 하강하는 새로운 기록을 세웠다. 1997년 폴란드 원정대가 남서릉을 10월 20일 초 등정하였다. 1984년 한국 은벽산악회는 83년 도전에 이어 김영자 대원이 동계 초 등정을 하였다고 주장을 했으나 아직까지도 미궁으로 남아있다 한국은 공식적으로는 1994년 경남산악연맹의 박정헌 대원이 남벽을 통하여 등정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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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가셔브롬1봉

가셔브롬 1봉(Gasherbrum 1 & Hidden Peak 8,068m)

 

■ 갸셔브룸 I봉(8068m) 북위 35도 43분. 동경 76도 42분 1861,1887년 고드윈 오스틴 소령과 영허즈 밴드 소령에 의해 처음으로 알려졌다. 숨은 봉우리란 뜻의 히든 피크라고도 불린다. 1934년 스위스 원정대가 남서릉을 통하여 6300m까지 도달하였다. 1958년 미국의 원정대가 동면으로 피터 셰닝과, 울릭 카우프만이 7월 5일 초 등정을 한다. 미국이 등정하기 전까지 남아있는 8.000m봉은 다울라기리와 시샤팡마 뿐이었다. 이 등반으로 미국은 세계 1위의 대국이라는 자존심을 세울 수 있었다. 1975년 라인홀트 메스너와 피터 하벨러는 4일 만에(오를 때 2번 비박, 하산할 때 2번 비박)무 산소 알파인 스타일로 북서벽을 초 등정한다. 1977년 유고슬라비아 원정대는 남서릉을 초 등정한다. 1980년 프랑스 원정대는 남릉의 초 등정을 해낸다. 1982년 독일의 원정대는 북벽 신루트로 G. 슈투름, M. 다허, S. 튓파우어가 등정한다. 한편 프랑스 원정대는 4명이 등정하는데 소당은 정상에서 베이스 캠프까지 스키로 활강하는데 이것은 8000m봉에서의 완전 활강으로 기록되었다. 그의 부인은 여성 초 등정자가 됐다. 1983년 스위스 원정대의 E. 로레탕, M. 루에디, J.C. 소넨빌은 2주일 동안 가셔브룸 1봉, 가셔브룸 2봉, 브로드 피크를 알파인 스타일로 등정하는 기록을 세운다. 이때 북벽에 새로운 루트를 추가시킨다. 같은 해 폴란드의 J. 쿠쿠츠카와 W. 쿠르티카는 남서벽을 알파인 스타일로 등정한다. 또 스페인 원정대는 남서벽과 남동릉을 잇는 신 루트를 개척하며 스키 활강을 한다. 1984년 라인홀트 메스너와 피터 하벨러는 1주일에 걸쳐 베이스 캠르를 거치지 않고 사전 데포 없이 1봉과 2봉을 잇는 등반을 해낸다. 1995년 슬로베니아대는 정상에서 스키활강을 성공했다. 한국은 1990년 대전충남합동대가 시등하여 박혁상대원이 등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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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가셔브롬 2봉

세계최13고봉 카라코람의 가셔브롬2봉

 

■ 가셔브룸 Ⅱ봉(8035m) 북위 35도 46분, 동경 76도 39분 1909년 이탈리아의 아브루찌공이 이끄는 원정대의 사진사 V. 셀라가 초고리사 방면에서 정찰하였다. 1934년 스위스의 G.O. 디렌푸르트 지휘아래 국제대가 남측으로 약 6,250m까지 올랐다. 1956년 7월 7일 F. 모라벡 지휘 아래 오스트리아 원정대가 남서릉과 동릉을 경유하여 S. 라르흐, H. 빌렌파르트, F. 모라벡이 1번의 비박을 하면서 초 등정하였다. 1975년 프랑스 원정대는 남동릉을 경유하여 재등을 하였다. 같은해 폴란드 원정대는 북서벽에 신루트를 개척하면서 등정했다. 이때 폴란드의 W. 루트키에비치는 여성원정대의 대장으로 2명의 여성을 등정시킨다. 1981년 스위스 원정대가 알파인 스타일로 등정한다. 1982년 프랑스인 부부등반가인 L. 바라르, M. 바라르 정상에 올랐다. R. 메스너는 파키스탄의 두 등반가와 알파인 스타일로 등정한다. 1983년 스위스 원정대는 남서릉으로 폴란드 원정대는 동릉으로 등정한다. 이때 W. 쿠르티카와 J. 쿠쿠츠카는 가셔브룸Ⅰ봉과 가셔브룸Ⅱ 사이 안부에 신루트를 개척했다. 1984년 R. 메스너와 H. 캄머랜드는 가셔브룸Ⅰ봉과 가셔브룸Ⅱ봉을 잇는 종주등반을 행한다. 이때 프랑스와 스위스의 두 등반가가 스키로 활강을 한다. 한국은 성대산악회는1991년 재도전을 하여 한상국, 김창선, 김수홍, 유석재가 전원등정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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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브로드 피크

 

■브로드 피크(8047m) 북위 35도 48분. 동경 76도 34분 1892년 W. M. 콘웨이가 이끈 영국의 탐험대가 붙인 이름이 오늘날의 이름이 되었다. 이전의 이름은 팔첸캉리였다. 1909년 이탈리아의 V. 셀라가 이산의 북면, 서면, 남면의 사진을 고국에 가져 왔다. 1934년 국제대가 서릉을 통한 등반가능성을 타진했다. 1954년 독일, 오스트리아 원정대가 남서사면을 시도하였으나 약 6900m에서 포기한다. 1957년 오스트리아의 M. 슈무크가 이끈 원정대는 소규모 원정대이지만 강력한 4인조 원정대 H. 볼, M. 슈무크, K. 디엠베르그, F. 빈터슈텔러가 무산소로 6월 9일 초 등정한다. 1953년 낭가 파르바트를 초 등정한 헤르만 볼은 2개의 8.000m봉 초 등정이라는 영광을 얻지만 18일 후 건너편에 있는 초골리사 등반 중 눈 처마가 붕괴되어 사망을 한다. 1975년 폴란드 원정대는 서릉을 통하여 중앙봉을 초 등정하지만 하강 도중 3명이 추락사한다. 2명의 일본인은 주봉의 두 번째 등정자가 된다. 1982년 R. 메스너는 N. 사비르, S. 칸과 출발점에서 변형루트를 개척하면서 노말 루트를 따라 등정을 하면서 1년에 3개의 8.000m 등정이라는 기록을 세운다. 1983년 이탈리아의 R. 카사로토가 험난한 북릉을 경유하여 북봉(7,800m)을 초 등정한다. 6월 하순 폴란드의 여성등반가 K. 팔모브스카와 A. 체르빈스카가 여성등정자가 되었다. 1984년 V. 쿠르티카와 J. 쿠쿠츠카는 획기적인 등반 북봉-중앙봉-주봉을 잇는 종주 등반을 함으로써 히말라야 등반의 새로운 방법을 제시한다. 1987년 폴란드와 영국합동대는 동계 초 등정을 한다. 1992년 영국원정대는 남서벽과 남릉을 시등했다 1994년 독일국제대는 서벽 다이렉트 등반을 성공 등정을 한다. 1995년 일본의 원정대는 1984년 폴란드 원정대의 횡단 등반을 다시 재등을 한다 1995년 7월 12일 스페인 원정대에 참가했던 엄홍길 대원과 빛고을원정대의 박현재, 박신영, 이정현대원이 등정을 하면서 한국의 8.000m 14좌 완등이라는 목표를 달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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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시샤 팡마

 

■ 시샤 팡마(8.027m) 북위 28도 21분. 동경 85도 47분 중국 내륙 티베트 자치구에 있는 관계로 중국의 폐쇄정책으로 개방이 되지 않아 제일 마지막으로 중국에 의해 등정이 된 8.000m봉이다. 이때까지의 이름은 고사이탄이라고 불렸다. 1963년 중국-티베트합동대가 북면으로 약 7.500m까지 도달했다. 1964년 5월 2일 중국-티베트합동대가 북서벽과 북릉을 경유하여 10명의 대원이 초 등정한다. 이들은 모두 초모롱마를 오를 베테랑 들이었다. 이들은 중국기와 모택동 조각, 중국등산대 쉐칭외 9명이 시샤팡마 정복함이라고 쓴 종이를 묻고 하산했다. 중국의 개방정책으로 외국인에게도 개방이 되어서, 1980년 5월 맨프레드 아베라인 독일원정대가 초등 루트를 따라 대원 6명이 정상에 올랐다. 1981년 여성 에베레스트 초등자인 일본의 다베이 준꼬가 이끈 일본 여성원정대가 성공한다. 같은 해 R. 메스너와 F. 무츄레히너가 정상암벽 아래에 변형 루트를 개척하며 등정했다. 1982년 영국의 원정대는 더그 스코트의 지휘아래 남벽에 중간 캠프와 고정자일 없이 스코트, 매킨타이어, R. 박스터 존스, 프리스코트가 높이 3.000m의 벽을 완등한다. 1983년 독일 원정대의 F. 루히징거가 사망을 하는데 이 산의 최초의 사망자가 된다. 그는 59세에 다울라기리를 오른 적이 있으며 1956년 5월 18일에 E. 라이스와 로체(8.516m)를 초 등정을 하기도 했다. 1991년 한국 히말라얀 클럽원정대가 도전을 하여 북동릉을 도전하였으나 악천후로 실패하고 다른 루트로 도전을 한 대한산악연맹 원정대의 김창선, 김재수대원이 등정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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